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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개발협력 역사

수원국으로서의 역사

한국은 해방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약120억 달러의 공적개발원조를 받았으며, 특히 1946-1980년까지 미국의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수원국 중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 제공된 원조는 긴급구호부터 구조조정프로그램까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면서, 경제 사회 개발에 일조하였습니다.

1950년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에 이루어진 원조는 전쟁으로 초토화되어 민간투자의 유인이 취약국이었던 우리나라로 유입되는 유일한 외국자본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원조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구호에 집중되었습니다. 또한 군사적 방어, 안정 및 재건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물자 및 식량원조 중심의 소비재 지원이 주를 이루었고, 경공업 육성을 위한 중간재 지원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 한국은 원조자금에 높은 의존도를 보였으며, 주요 공여국은 미국으로,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5억 5천 30만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받았습니다.

1960년대

1960년대에는 경제구조 전환기로서 성장 및 투자가 화두였습니다. 대부분이 무상원조였던 이전 복구시기와는 달리, 1960년대부터는 양허성차관이 도입되어 대기업 등을 중심으로 사회간접시설 구축, 전략적 수출 및 수입대체 산업 육성을 위한 프로젝트 원조와 자본재 지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개발 재원으로서 원조의 상대적 중요성이 줄어들었으며, 공여국도 미국 외에 일본의 비중이 증가하였습니다.

1970~1980년대

1970, 80년대에는 대규모 개발사업과 중화학공업 발전의 추진을 위해 도입된 과도한 외채부담에 대한 우려 속에서, 과거 단위사업 중심의 프로젝트 차관은 특정 부문의 종합적 개발을 위한 섹터차관 및 경제 및 산업 전반의 구조를 조정하기 위한 구조조정차관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이 지원받은 차관 중 비양허성 자금의 비율상승과 함께 원조규모가 감소하고, 미국을 대체하는 일본의 역할대두 및 독일, IBRD, ADB 등 공여기관의 다원화가 나타난 것이 특징입니다.

1990~2000년대

1990년대는 원조 수원국에서 순수 원조 공여국으로의 원조지위전환기로, 한국은 1995년 세계은행의 차관 졸업국이 되었으며 2000년 DAC 수원국 리스트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 한국의 수원 역사: 원조 전환기에 따른 구분

한국의 수원 역사:원조 전환기에 따른 구분
기간 목적 및 욕구 형태 및 양식 분야 및 구성 원조 의존도 주 공여자
1945-1952
해방직후-전쟁기
- 긴급구호 - 증여(100%)
- 구호물품
- 교육
- 토지개혁
원조가 주요 외화유입 수단 - 미국
1953-1962
이승만대통령 재임시
- 군사적 방어
- 안정
- 재건사업
- 증여(98.5%)
- 물자
- 기술협력
- 농업 - 군사원조
- 물자, 식량지원
- 소비/중간재
높은 원조 의존도 - 미국
- UN
1963-1979
박정희대통령
재임시
- 전환기
- 성장 및 투자
양허성 차관(70%) - 사회간접자본
- 수입대체 및 수출지향적 사업
- 프로젝트원조 및 중간 및 자본재
절대/상대적 원조 중요성 감소 - 미국
- 일본
1980-1992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재임시
- 과도한 채무
- 안정 및 성장 균형
비양허성 차관 - 섹터차관 - IDA수원국 명단 졸업 - 일본
- 독일
- 국제금융기구
1993-2003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재임시
- 금융위기 IMF 구제금융 - 구조조정 프로그램 - ODA 수원국 명단 졸업 - IMF
- IBRD

출처: 정우진(2010), “Successful Asian Recipient Countries: Case Studies of Korea and Vietnam” 국제개발협력 2010년 3호

공여국으로서의 역사

1960년대

우리나라가 1963년부터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개발원조를 시작하는 원조공여국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성공적인 경제발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에 대응하여 1963년 미국국제개발처(USAID) 원조자금에 의한 개발도상국 연수생의 초청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5년부터는 우리정부 자금으로 개발도상국 훈련생 초청사업을 실시하였으며, 1967년에는 해외로 전문가를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7년에도 외무부 주관으로 UN 및 기타 국제기구와의 협력 사업으로 외국인 초청프로그램을 실시했습니다.

1970년대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유엔기구 등의 자금을 지원받아 개발원조를 실시하였으나, 우리 경제가 성장하자 개도국으로부터의 원조수요가 매년 증가하여 점차 우리정부 자금에 의한 원조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1975년 노동부가 개도국 기능공 초청연수를 시작했습니다. 1977년 외무부가 최초로 9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우리나라 기자재를 개도국에 공여함으로써 물자지원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대

1982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개도국 주요 인사를 초청하여 우리의 개발경험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국제개발연찬사업(IDEP)을 시작하였습니다. 1984년에는 건설부에서 현재의 개발조사사업에 해당하는 무상건설기술 용역사업을, 노동부에서는 직업훈련원 설립 지원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외채 감축과 국제수지 흑자의 실현으로 우리나라의 개발원조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우리의 경제규모 증가와 국제무대에서의 위상 제고로 그에 상응하는 국제적 책임 수행이 요청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대외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개도국에 대한 수출증진 및 우리 기업의 진출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ODA 증대를 통한 개도국과의 협력강화 필요성이 증대되었습니다.
1987년 재무부가 300억 원을 출연하여,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Economic Development Cooperation Fund)을 창설하고 기금의 운용을 한국수출입은행에 위탁하였습니다.
1989년 EDCF은 나이지리아에서 최초 차관계약 체결이 되었습니다. 1989년 정부는 UNESCO 한국청년해외봉사단원 파견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대

1991년에는 무상원조 전담기관으로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협력단(KOICA: 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을 설립하여 개도국에 대한 본격적인 원조제공의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그리고 KOICA가 1992년 프로젝트사업과 1995년 국제협력요원파견 및 민간원조단체(NGO)지원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992년 세계은행(World Bank) 및 1993년 아시아개발은행(ADB)과 협조융자 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995년에 한국국제협력단 주관으로 국제협력연수센터(ICTC)가 개원되었고, 베트남에서 KOICA와 한국수출입은행간 최초 연계 지원 승인 얻었습니다.
한국은1996년 29번째 회원국으로 OECD에 가입하여 빈곤저개발 상태의 신생도상국 중에서 최초로 경제협력체 회원국에 합류하는 등 공여국으로서 국제 원조 사회에 한걸음 다가섰습니다.

2000년대

2000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원조 공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제고되면서 원조의 급격한 양적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2001년 9/11테러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2003년 이라크전 발발, 2004년 남아시아 쓰나미 발생 등으로 원조공여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2005년에는 우리나라의 미주개발은행(IDB: Inter-American Development Bank) 가입으로 다자간 원조 확대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으며, 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 규모는 7억 달러를 돌파하였습니다.
또한 2006년 최초로 한 - 아프리카 장관급 경제협력회의(KOAFEC)를 개최하여 아프리카에 우리나라의 경제개발경험을 전수하고, 한국 - 아프리카간 경제협력 활성화에 이바지 하였습니다. 2006년에도 국무총리실 산하 국제개발협력회가 설치되었습니다.
한국수출입은행 설립 이래 2008년에 대외경제협력기금 연간승인액이 초과했습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파견 해외봉사단 단일 브랜드 “World Friends Korea”가 출범되었습니다.

2010년대

2010년 한국은 선진 공여국의 포럼인 국제개발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G20에서 서울개발컨센서스를 이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2011년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를 주최함으로써 효과적인 개발을 위한 새로운 글로벌 컨센서스 형성에 기여하고 있습니다.